기타유물
화재국사비
고려 숙종 때 원효 스님께 화쟁국사(和諍國師)를, 의상 스님께는 원교(圓敎)국사의 시호를 내렸다. 아울러 관련된 절에 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길이 보존케 하라는 어명이 있었다. 그 후 고려 명종 때 원효 스님이 출가한 절인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고려분황사화쟁국사비(高麗芬皇寺和諍國師碑)〉를 세웠으나, 지금은 비석은 없어지고 귀부만 분황사 모퉁이에 서 있다. 이 추사의 글씨는 이 귀부에 새긴 글씨며, 글의 끝 월자는 趺 부자의 이체자가 아닌가 생각된다.추사가 1817년 그의 나이 32세 때 무장사 비편을 찾기 위해 경주를 방문했을 때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의 靜 정자는 諍 쟁자를 잘못 알고 새긴 것 같다.
삼룡변어정
지금도 관광객의 목을 축여주는 분황사의 우물은 신라시대에 만든 것이다. 우물의 겉모양은 팔각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외부의 팔각모양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하며 내부의 원형은 원불(圓佛)의 진리를 상징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빼앗아왔다고 한다. 그 뒤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부터 천년 전에 만들어졌던 신라시대의 우물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남아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
화쟁국사비편 우물 옆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비대좌는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원효의 화쟁국사 비이다. 숙종6년(1101) 8월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에는 방치되어 있었던 듯 비신을 받쳤던 비대가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대좌 위쪽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써놓았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